Back

ⓘ 해미 곽씨는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곽해는 현풍 곽씨의 시조인 곽경의 12세손으로 고려 공민왕조에 좌우보승중랑장을 지냈다고 ..




                                     

ⓘ 해미 곽씨

해미 곽씨는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곽해는 현풍 곽씨의 시조인 곽경의 12세손으로 고려 공민왕조에 좌우보승중랑장을 지냈다고 한다.

                                     

1. 역사

해미 곽씨海美 郭氏는 현풍 곽씨玄風 郭氏 시조인 곽경郭鏡의 12세손인 고려말 공민왕조에 중랑장을 지낸 곽해郭海를 시조로 보고 있다1976년 병진보. 1930년 곽경의 묘지에서 발견된 지석誌石에 의하면, 곽경은 중국 관서關西의 홍농인弘農人으로서 고려에 귀화한 후 1138년인종 16 과거에 급제하여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등을 역임하고 포산군苞山君에 봉해졌다.

1936년에 발간된 해미곽씨세보海美郭氏世譜)에 따르면, 곽경 이후에 2세 곽헌郭憲은 지승선知承善을, 3세 곽림郭琳은 문하대아찬門下大牙贊을, 4세 곽연郭演은 문하중랑장門下中郞將을, 5세 곽기정郭其正과 6세 곽자응郭子膺은 이부상서吏部尙書 등을 역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에 의하면 곽해 이전의 선대가 현풍 곽씨와 일치하고 있어서 해미곽씨가 현풍곽씨의 분적종임을 추정할 수 있다.

한편, 만성시조약사萬姓始祖略史)에 따르면, 곽승郭繩이 충청남도 해미海美로 귀양을 가서 그곳에 정착하여 해미곽씨의 세계世系를 열었다고 되어 있으나, 곽승은 해미곽씨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이는 1743년계해보에 발간된 포산곽씨족보를 보고 작성한 것인 듯하다. 곽승郭繩은 조선시대 사람으로 현풍곽씨 판관공파判官公派 14세로 되어 있는데, 창원교수昌源敎授를 지냈고, 묘는 상주묵곡尙州墨谷에 있다. 배配는 진양정씨晋陽鄭氏이고, 숭원崇元, 숭형崇亨, 숭이崇利, 숭정崇貞 등 4명의 아들을 두고 있는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2011신묘보 상Ⅱ권 1598쪽. 증조부曾祖父는 전공판서典工判書를 지낸 11세 유례游禮, 조부祖父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12세 사師, 부친은 판관判官을 지낸 13세 득하得賀로, 승은 득하의 4자子로 등재되어 있다.

곽승郭繩은 곽해郭海보다 반세기가 넘게 후세 사람인데 할아버지로 등재했다.1743 계해보

1743년 계해보 발간 뒤, 족보의 기록이 잘못된 것임을 발견하고 후손들에 의해 몇 차례 수정된 뒤, 1976년병진보부터 12세 곽해郭海를 해미곽씨 시조로 인식하고 있다. 11세 금산이 아버지로 되어있으나, 사실은 아버지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음. 곽해郭海는 공민왕조에 중랑장을 지냈으나, 고려말 이성계의 용흥에 반대하여두문동 48현 관직을 포기하고 가족과 함께 세상을 떠돌다 지금의 해미당시는 여미로 내려가 숨어 지냈다. 후손들은 해미군을 제수받았다고 쓰고 있으나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자세하지 않다. 다시 계룡산지금은 대전광역시 유성구 송정동에서 잠시 머문 뒤지금도 ‘곽해들’에 관한 전설이 남아있다, 광주 임곡林谷의 소고룡방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산막동으로 내려와 은둔했다. 곽해郭海는 호남입향조로 많은 후손들이 호남을 주 근거지로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중랑장공파 아래 5개 파가 있다. 광주광역시광산구산막동 유연재油然齋에 봉향, 매년 3월 마지막 일요일에 제향하고 있다.

                                     

2. 본관

해미海美는 충청남도 서산시에 있는 지명으로, 정해貞海와 여미餘美 두개 현이 합쳐진 지명이다. 백제 때 여촌현餘村縣이라 하였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 여읍현餘邑縣으로 개칭하였고, 고려 초에 여미현餘美縣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정해현은 삼국시대에는 우견현牛見縣 또는 고구현高丘縣이라 불리다가 역시 고려 초에 그 일부가 분할되어 정해현貞海縣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407년태종 7에 정해현과 여미현을 병합하여 해미현으로 개칭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해미군으로 승격되었고,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서산군에 병합되면서 지성면이 되었다가, 1917년 해미면으로 개칭하였다.

                                     

3. 인물

  • 곽기수郭期壽, 1549년 ~1616: 본관은 해미海美. 자는 미수眉壽, 호는 한벽당寒碧堂. 아버지는 세공世功이다. 전라도 강진康津 출신. 1579년선조 12 진사과에 합격하였으며, 158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그 뒤 관직이 예조좌랑에 이르렀다. 부안현감에 재직중 부모가 모두 90여의 나이가 되매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광해군의 치세에는 두문불출하면서 오로지 『주역』의 연구에 몰두한 결과, 『주역』의 암송으로 귀신을 쫓을 수 있다고까지 할 정도로 세간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저서로는 『안택지安宅誌』 『사방해四方解』 등이 있다.
  • 곽성구郭聖龜, 1606년 ~ 1668년: 곽기수의 손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된 뒤, 1631년인조 9 태학시취太學試取에서 2등을 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의 은전을 입었으며, 같은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40년 지평이 되고, 1646년 장령에 올랐으며, 1665년현종 6까지 장령에 10여 차례 임명되었다. 정언을 거쳐 1650년효종 1 필선이 됨으로써 뒤의 현종을 보도하였다. 1655년 이후 1667년까지 헌납에도 여러 차례 올랐다. 문집으로 『현주세고玄洲世稿』 2권 1책과 친필문집 남한록南漢錄이 전한다.
  • 곽제화郭齊華, 1625년 ~ 1675년: 곽성구의 아들. 1650년효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持平 정언正言 장령掌令을 역임하였다. 1663년현종 4 경성판관鏡城判官이 되었을 때 월과月課를 계속 세번이나 짓지 않았다 하여 파직됨과 동시에 본읍에 충군充軍되었다. 1675년에 다시 헌납에 제수된 이후 사간 집의執義를 역임하였다.
                                     

4. 과거 급제자

해미 곽씨海美郭氏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명을 배출하였다.

문과

곽기수郭期壽 곽성구郭聖龜 곽제화郭齊華

무과

곽희인郭希仁, 중종35년1540년 무과 급제) 곽곤郭崑, 선조17년1584 별시 병과 합격)

생원시

곽치요郭致堯 곽급郭岌 곽성구郭聖龜 곽성봉郭聖鳳 곽제화郭齊華

진사시

곽형郭逈, 명종10년1555 을묘 식년시 합격) 곽기수郭期壽 곽제화郭齊華 곽제항郭齊恒

                                     

5. 인구

  • 2000년 453가구, 1.491명
  • 1985년 180가구, 799명
  • 2015년 3.025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