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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열 남궁씨 는 전라북도 익산시 함열읍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남궁원청 이 고려 성종 때 여진족을 백두산 이북으로 몰아낸 공으로 문하시중평장사에 임 ..




                                     

ⓘ 함열 남궁씨

함열 남궁씨 는 전라북도 익산시 함열읍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남궁원청 이 고려 성종 때 여진족을 백두산 이북으로 몰아낸 공으로 문하시중평장사에 임명되었다.

                                     

1. 기원

남궁씨南宮氏의 유래由來는 중국中國의 고대古代에서 비롯된다. 본래本來 주나라의 왕족王族인 희성姬姓이었다. 주 이전의 상나라 때 남南쪽 궁宮에 살았다 하여 남궁南宮으로 씨氏를 정하였다고 하므로 희성남궁씨姬姓南宮氏가 된다.

남궁南宮씨를 처음 사용使用한 인물은 남궁괄适=括로 추정推定된다. 남궁괄은 주 문왕周文王의 사우四友 중 한 사람이다. 그가 대장군大將軍으로 있을 때 폭군暴君인 상나라 주왕紂王-BC1154 ~ 1111에 의해서 투옥投獄된 문왕文王을 기지機智를 발휘發揮하여 구해내기도 하였다. 그는 무왕武王을 도와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周를 건국建國한 공신功臣으로 이상서二尙書에 오르고 한 지방地方을 식읍으로 받아 다스리게 되었으며 그 곳의 지명地名을 그의 씨氏를 따라 남궁현縣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춘추시대春秋時代 공자孔子의 사위가 된 남궁괄括과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이다.

한국 남궁씨南宮氏의 원조遠祖는 주周 나라의 남궁수 南宮修이다. 남궁수는 기자箕子와 함께 조선에 동래東來하면서 평양平壤을 중심으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건국建國하고 사도司徒의 직職에 올라 백성들에게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을 가르쳤으며, 음식의 예법禮法과 제사祭祀에는 편두祭器를 쓰게 하며 의관제도衣冠制度와 직제職制를 중국과 같게 하였다고 한다.

                                     

2. 역사

시조 남궁원청 南宮元淸은 비서랑秘書郞을 역임하고, 991년고려 성종 10년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여진족을 백두산白頭山 북방까지 몰아내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워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임명되었으며, 감물아백甘勿阿伯에 봉해졌다. 이후 세보가 실전되어 그의 후손 남궁득희 南宮得禧을 1세조로 한다. 남궁득희의 증손 남궁민南宮敏은 고려 충숙왕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간의대부를 지냈다.

                                     

3. 본관

함열咸悅은 현재의 전라북도 익산시 함열읍이다. 마한 때 감물아현甘勿阿縣이라 불리다가, 통일 신라 경덕왕 때 함열咸悅로 고쳤다.

                                     

4. 인물

  • 남궁민南宮敏: 남궁득희의 증손. 1336년고려 충숙왕 복위 5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1347년충목왕 3 정치도감整治都監이 설치되었을 때, 정치관整治官에 임명되어 경상도도민전慶尙道度民田 겸 안렴존무사按廉存撫使로 활약하였다. 벼슬은 간의諫議에 이르렀다.
  • 남궁계南宮啓, ? ∼ 1446년: 6세손. 문음門蔭으로 출사하여 3품에 올랐고, 1401년태종 1 좌명원종공신佐命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413년태종 13 대호군大護軍을 지내고, 1426년세종 8 정주목사定州牧使 거쳐 판의주목사判義州牧事를 역임하였다. 1430년세종 12 동지총제同知摠制를 지내고, 1435년세종 17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었다. 1436년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온 후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었다. 1439년 전라도 도절제사全羅道都節制使를 거쳐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제수되었다. 1443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에 이르렀고, 1446년 졸卒하자 세종이 부의賻儀를 내리고 조문弔問하였다.
  • 남궁찬南宮璨: 9세손. 자는 여헌汝獻, 호는 창랑滄浪. 할아버지는 군수 남궁치致이고, 아버지는 생원 남궁순順이며, 어머니는 감찰 최돈崔敦의 딸이다. 1477년성종 8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489년성종 20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에 보임되었다. 1493년성종 24 이조좌랑吏曹佐郞을 역임하고, 1495년연산군 1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과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역임하였다. 1497년연산군 3 문신文臣의 정시庭試에서 수석을 차지했다. 1498년 홍문관부응교가 되었다. 1499년 봉정대부奉正大夫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지제교知製敎 겸 승문원 교감承文院校勘으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00년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제주목사濟州牧使에 부임하였고, 1504년연산군 10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 남궁숙南宮淑, 1491년 ∼ 1553년: 10세손. 아버지는 관찰사 남궁찬璨이고, 어머니는 신자승申自繩의 딸이다. 1516년중종 11 생원이 되고, 1533년중종 28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박사에 보임되었다. 활쏘기에 능했으므로 1536년 교서관 부정자校書館副正字로서 관사觀射에서 1등하여 자급資級이 올랐다. 이후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였다. 1544년 안산군수安山郡守로 재직 중 청렴근면하고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는 경기도관찰사 홍섬洪暹의 장계에 따라 가자되었다. 1547년명종 2 승정원 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에 제수되었다. 1548년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었다. 해주교생 안세복 등이 남궁숙이 선정을 베풀었으니 계속 유임하게 해달라는 상소를 청하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가자되었다가 전라도관찰사로 전임되었다. 1550년명종 5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역임하고, 1551년명종 6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되었다. 1553년명종 8 10월 23일에 종2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졸卒하였다. 명리名利를 탐하였으나 직무에는 근면하여 사람들이 능력있는 관리라고 일컬었다.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86에 있다.
  • 남궁익南宮翼: 이조판서 남궁찬南宮璨의 둘째 아들. 문음門蔭으로 한성부 가낭관漢城府假郞官을 제수받았고, 중종조에는 수운판관을, 명종조에는 동복 현감同福縣監을 역임하였다. 부인은 김인각金麟角의 딸인 연안 김씨延安金氏이다. 아들은 남궁희南宮憘, 남궁침南宮枕, 남궁개南宮愷이다.
  • 남궁침南宮枕, 1513년 ∼ 1573년: 동복현감同福縣監 남궁익翼의 아들. 1540년중종 35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1544년 사간원정언, 1546년명종 1 지평 헌납을 거쳐 1548년 홍문관 수찬으로서 강원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구황 실태를 조사하고 돌아왔다. 홍문관수찬지제교 겸 경연검토관弘文館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으로 『중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이조좌랑과 부응교副應敎를 역임했다. 1552년 홍문관전한을 거쳐, 경상도 어사로 파견되어 민생의 고충을 탐문했고, 지방 수령들의 탐학을 적발하고 돌아와 홍문관직제학에 승진했으며, 1553년 승정원 좌승지에 올랐다. 1557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1558년 진위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같은해 장례원판결사를 거쳐 개성부유수가 되었다. 1563년 한성부우윤 한성부좌윤을 거쳐 형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564년 전라도관찰사, 1565년 함길도관찰사로 나갔고, 1566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567년 명종의 승하시 부총관으로서 치안을 담당하였고, 선조가 즉위했을 때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재직하였다.
  • 남궁제南宮悌: 아버지는 함경도 관찰사 남궁숙南宮淑이고, 어머니는 고흥 류씨高興柳氏이다. 1568년선조 1 증광 생원 진사 양시兩試에 합격하여 백천 군수와 연안 부사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593년선조 26 류성룡柳成龍이 감진관監賑官에 임명하여 호남에서 조운된 곡식을 이용해 한양의 기근 문제를 해결하였다. 지방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백성을 잘 다스리고 국사國事를 성실히 처리한 점을 인정받아 1596년선조 29 당상堂上을 가자加資 받았다.
  • 남궁경南宮檠, 1562년 ~?: 자는 여명汝明, 호는 풍계楓溪. 고조부는 남궁찬璨, 할아버지는 남궁개愷이고, 아버지는 남궁도渡이며, 어머니는 이진중李震中의 딸이다. 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급제, 1612년광해군 4에 현감으로서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16년 행 세자시강원필선으로 『선조실록』을 찬수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듬해 지평으로서 광해군의 처사를 지탄하는 흉격지변兇檄之變을 처리할 때 병을 핑계로 불참한 까닭에 체직되었다가 곧 검상 사인을 역임하였다. 1618년 강홍립姜弘立이 도원수로 창성昌成에 갔을 때, 유장儒將으로 종사관이 되어 따라갔다가 기역마騎驛馬를 남용했다는 이유로 이듬해 1월에 물러났다. 1623년 인조반정 직후에는 삭직되었다. 그러나 대북파大北派에 적극 가담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뒤에 풀려나 1625년인조 3에는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 남궁집南宮鏶, 1601년 ∼ 1668년: 자는 강중剛仲, 호는 삼졸재三拙齋. 아버지는 남궁율嵂이며, 어머니는 한옹韓顒의 딸이다. 1618년광해군 10 사마시에 합격, 1630년인조 8에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전경시강專經試講에 우등하여 좋은 말 한필을 상으로 받았다. 인조 효종 때에는 대사헌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660년현종 1 당시의 붕당정치를 비판하면서 붕당설朋黨說을 상소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동 서 양당이 여러 파로 갈라져 인물추천에 편당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과 편당이 되어 바른 말을 하는 자를 배척하여 비루한 자가 등용되어 대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물을 등용하는 데 있어서는 마음이 공정하고 식견이 밝고 도량이 있는 자를 삼공三公의 자리에 앉힐 것과 재질과 기량이 적당한 자들을 뽑아 6조 3사의 장으로 삼아 책임 있는 인재등용을 하도록 함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붕당론은 당시 당쟁으로 빚어지는 상황을 잘 지적하고 있다. 저서로는 『삼졸와유고三拙窩遺稿』가 있다.
  • 남궁옥南宮鈺, 1620년 ∼ 1699년: 자는 여상汝常, 호는 창주滄洲. 아버지는 관찰사 남궁율嵂이며, 어머니는 한옹韓顒의 딸이다. 1646년인조 24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652년효종 3에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1669년현종 10 예조정랑으로 길재吉再 김장생金長生을 제향한 서원에 사액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 뒤 일곱번이나 군현의 수령을 지냈다. 1690년숙종 16에는 승문원판교 겸 춘추관편수관을 거쳤으며, 시정寺正까지 이르렀다. 문장과 서화에 뛰어났으며, 특히 속필로 유명하다. 청백淸白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작품으로 개풍천마산開豐天摩山의 대흥사중건비문大興寺重建碑文의 글씨가 있다.
  • 남궁석南宮晳, 1938년 ~ 2009년: 한국통신 하이텔 사장. 삼성전자 정보통신 총괄사장. 삼성SDS 대표이사 사장. 제5대 정보통신부 장관. 제16대 국회의원.
  • 남궁진南宮鎭, 1942년 ~: 제4대 문화관광부 장관. 제14 15대 국회의원.


                                     

5. 과거 급제자

함열 남궁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5명을 배출하였다.

고려 문과

남궁민南宮敏

문과

남궁갑南宮鉀 남궁경南宮檠 남궁배南宮培 남궁성南宮惺 남궁숙南宮淑 남궁옥南宮鈺 남궁지南宮芷 남궁집南宮鏶 남궁찬南宮璨 남궁침南宮忱 남궁해南宮楷 남궁활南宮活 남궁효南宮孝 남궁후南宮垕 남궁희南宮憘

무과

남궁견南宮涀 남궁담南宮倓 남궁술南宮銊 남궁옥南宮鈺 남궁운南宮雲 남궁웅南宮雄 남궁철南宮哲 남궁첨南宮瞻 남궁필南宮弼

생원시

남궁걸南宮杰 남궁권南宮權 남궁니南宮柅 남궁두南宮斗 남궁명南宮蓂 남궁석南宮晳 남궁석南宮碩 남궁석南宮錫 남궁숙南宮淑 남궁술南宮述 남궁억南宮億 남궁열南宮閱 남궁영南宮鍈 남궁옥南宮鈺 남궁용南宮鏞 남궁우南宮楀 남궁원南宮垣 남궁전南宮㙉 남궁제南宮悌 남궁진南宮縉 남궁집南宮鏶 남궁찬南宮璨 남궁초南宮礎 남궁택南宮澤 남궁호南宮鎬

진사시

남궁개南宮愷 남궁경南宮鏡 남궁경南宮檠 남궁률南宮嵂 남궁민南宮 남궁석南宮錫 남궁숙南宮塾 남궁원南宮愿 남궁익南宮熤 남궁일南宮鎰 남궁정南宮埞 남궁제南宮 남궁제南宮悌 남궁졸南宮 남궁지南宮芷 남궁찬南宮撰 남궁철南宮澈 남궁탁南宮鐸 남궁필南宮弼 남궁해南宮楷 남궁현南宮玹 남궁협南宮鋏 남궁형南宮珩 남궁혜南宮蕙 남궁환南宮瓛 남궁활南宮活 남궁효南宮孝 남궁희南宮憘

음관

남궁갑南宮鉀 남궁복南宮復 남궁복南宮濮 남궁석南宮錫 남궁석南宮鉐 남궁숙南宮 남궁숙南宮肅 남궁심南宮 남궁억南宮檍 남궁영南宮泳 남궁옥南宮鈺 남궁용南宮溶 남궁용南宮鎔 남궁원南宮沅 남궁일南宮鎰 남궁정南宮錠 남궁표南宮杓 남궁항南宮沆 남궁형南宮瀅 남궁홍南宮泓

                                     

6. 인구

  • 1985년 3.812가구 15.901명
  • 2000년 5.666가구 18.703명
  • 2015년 20.715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