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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산 감씨 는 경상남도 창원시를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창원 감씨 昌原 甘氏 또는 합포 감씨 合浦 甘氏라고도 한다. 시조 감규 甘揆는 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




                                     

ⓘ 회산 감씨

회산 감씨 는 경상남도 창원시를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창원 감씨 昌原 甘氏 또는 합포 감씨 合浦 甘氏라고도 한다. 시조 감규 甘揆는 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1349년고려 충정왕 1 공민왕 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배행하여 고려 들어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으며,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

                                     

1. 기원

감甘씨는 중국 주나라 무왕의 셋째 아들 숙대叔帶가 감후甘侯에 봉해지고 그 곳을 식읍으로 하사받은 후, 그 땅 이름을 성으로 삼은 데서 유래되었다.

                                     

2. 역사

한국 회산 감씨의 시조는 감둥리 로 다른 이름으로 고려 공민왕 재위 시기에 규 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감규 甘揆 = 甘王+癸가 불리었으나 천민으로 강등되면서 다시 감둥리 라는 이름으로 돌아갔다. 자는 양원養元, 호는 연강延岡이다. 문제는 이 후손들 조차도 본인의 시조인 감둥리의 고려 귀부 이후의 이름인 감규는 알면서 시조의 원래 이름은 감둥리는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호인 감연강에서 후손들이 잘못알고 붙인 호인 영강을 붙여 감둥리라는 이름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감영강이 시조의 이름으로 와전되는데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

감둥리는 수나라 출신의 조상을 둔 원나라 사람으로 1351년 노국대장공주를 따라 한림학사로서 고려에 들어와 공민왕에게서 규揆 이름을 하사받아 이후에는 감규로 알려져 있다.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으나 각종 부정부패로, 후에는 천민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공민왕이 하사한 규揆 이름을 풀어보면 임금 왕王+ 북방 계癸가 합쳐진 것으로 북쪽의 왕으로 해석되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공민왕이 일개 학사에게 왕을 칭하는 규揆라는 이름을 하사하는 등 호의를 베풀어 그의 환심을 산 후 반원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부정부패가 드러나자 재산몰수 후 천민으로 강등되었다. 이를 보면 일개 한림학사 감둥리에게 규揆 라는 왕을 뜻하는 이름을 하사한 것은 공민왕의 계책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과정에 감규는 규揆 이름을 도로 몰수당하고 본명 감둥리로 돌아갔다. 문제는 이미 고려 공민왕 재위기에 주어졌다가 박탈된 이름인데도 후손들은 시조가 천민으로 강등되어 본명인 감둥리로 돌아간 것이 껄끄러웠는지 시조를 감규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감규라는 이름은 공밍왕이 주었다가 박탈한 이름으로 본명은 감둥리이다.

손자인 평장사平章事 감흥협甘興鋏을 비롯하여 밀직제학密直提學 감소연甘紹延, 중추부사中樞府使 감진요甘震曜, 이부시랑吏部侍郞 감침甘鍼 등이 관직에 진출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조부인 감둥리가 천민으로 강등되면서 이들도 함께 천민으로 강등된 것으로 추정된다. 족보에 따르면 15세손 감수화甘受和 때까지 본관을 연릉延陵으로 삼아오다가, 16세손 감철 甘喆이 북벌을 간諫하여 중지하게 한 공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오르고 회산군檜山君에 봉해진 것을 계기로 본관을 회산으로 하고있다. 묘소는 충청도 공모산에 있었고 어제御題한 신도비가 무덕곡에 있었다고 하나 없어져 후손들이 세거지인 창원시 내리동에 제단과 신도비를 설치하고 매년 음력 4월15일 향사한다.고 되어있다.

                                     

3. 족보 위조의 의혹

회산 감씨의 주요 인물로 조선 인조 때의 무신 여일 감경인汝一 甘景仁이 있다. 감경인은 임진왜란 이후 포로교환 등에 적극적 참여 등으로 그 공을 인정받아 사후 충훈부로부터 삼렬三烈이라는 사호祠號를 받고, 삼렬사에 봉안되었다. 다만 감경인 이후로 직계 후손의 맥은 끊겨 방계로 맥이 이어졌으나 회산 감씨에서 이후 과거시험 급제자를 배출했다는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서 급제자 명단에 존재하지 않아 조선 중기 이후로 회산 감씨는 사실상 양반으로서는 몰락했고 갑오개혁 이후의 회산 감씨 족보는 실제 회산 감씨가 아닌 사람들이 꾸몄을 가능성도 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희귀 성씨의 족보위조 문제는 비단 회산 감씨뿐만 아니며 특히 대부분의 중국계 희귀 성씨는 그런 의혹을 받고 있다.

이러한 회산 감씨의 족보위조의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는 것은 감씨 문중에서 주장하는 15세손 감수화甘受和 때까지 본관을 연릉으로 삼아오다가, 16세손 감철甘喆이 북벌을 중지시킨 공으로 금자광록대부에 오르고 회산군檜山君에 봉함받은 뒤로 본관을 회산으로 한다는 것은 조선왕조실록 및 다른 사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회산 감씨 문중의 족보의 내용을 바탕으로 위처럼 주장하는 것들로 족보 자체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역사적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회산 감씨의 족보가 위조되었다고 의혹을 받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회산 감씨 문중에서는 시조 감규가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고 하지만 감규나 감둥리라는 인물이 연릉군에 봉해졌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연릉군延陵君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회산 감씨가 아닌 연안 이씨 문중의 이만원李萬元이다. 조선시대 논공행상 법칙에 의하면 공을 세운 신하를 지역 +군君에 봉할수는 있지만 이미 내려졌다면 줄수없는데 이만원을 연릉군을 봉한 시기는 조선 숙종때이므로 시기가 맞지 않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어찌 해석하여 감둥리를 연릉군에 봉했다고 해도 감둥리는 공민왕이 부정부패로 벼슬을 박탈하고 천민으로 신분을 강등시켰으므로 본관을 연릉으로 삼는것은 어찌 가능할지 몰라도 천민으로 강등당하면서 연릉군이라는 작위도 당연히 박탈당했을텐데 감둥리를 연릉군이라고 칭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으며 이때문에 족보의 위조로 의심받는 것이다.

2.16세손 감철甘喆이 북벌을 중지시킨 공으로 금자광록대부에 올랐다고 하는데 감둥리감규의 16세손이면 조선시대 이후나 가능한데 금자광록대부는 고려시대 벼슬로 고려시대 공민왕 생전에 이미 폐지되었다. 금자광록대부 벼슬 이전에 광록대부 라는 벼슬이 고려시대의 정 2품 문산계로서 존재했고 이후 1356년공민왕 5년 금자광록대부로 바뀌면서 종1품 상계가 되었으며, 1362년에 폐지되었다. 공민왕이 1375년도에 사망했고 노국대장공주와는 1949년도에 혼인을 했는데 감둥리는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고려에 왔는데 그렇다면 고려에 오고나서 1362년도에 폐지된 금자광록대부를 감둥리의 16세손인 감철이 얻는게 과연 가능한가? 라는 의혹이 제기되는 것이다. 애초에 감철이란 인물이 감둥리의 16세손이라면 조선 시대에 태어난 사람일텐데 북벌을 중지시켰다는 기록이나 그 부친인 15세손 감수화의 기록 자체가 조선왕조실록이나 야사에도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이들이 등장하는 기록은 회산 감씨에서 내세우는 족보가 유일하다. 문제는 국가의 실록에 존재하지 않는 공신의 인명이나 그 당시는 폐지하여 존재하지 않았던 벼슬을 받는것은 불가능하기에 족보의 위조로 의심받는 것이다.

3.16세손 감철甘喆이 북벌을 중지시킨 공으로 금자광록대부에 오르고 회산군檜山君에 봉함받은 뒤로 본관을 회산으로 한다고 하였는데 금자광록대부도 고려때의 벼슬이라 조선때 태어난 감철은 금자광록대부에 오르는게 불가능하지만 회산군檜山君에 봉함받는 것은 역모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이미 조선시대에 회산군이 존재하는데 왜 역모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면 바로 회산군은 성종의 다섯째 아들인 이염李恬이기 때문이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 회산군檜山君으로 기록된 이는 성종의 다섯째 아들인 이염李恬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본명은 이염李恬,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성종成宗의 다섯 째 아들로, 어머니는 숙의 홍씨淑儀洪氏이다. 중종 때 대신 김안로金安老가 임금에게 간언하는 것을 면전에서 꾸짖어 물리쳤다. 슬하에 아들이 없어 중종의 명에 의해 아우인 견성군甄城君의 둘째 아들 계산군桂山君 이수계李壽誡를 양자로 들였다. 묘는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 회산군檜山君에 대한 기록이 있고 봉해졌다는 기록은 있으나 이는 이염李恬으로 감철甘喆이 북벌을 중지시킨 공으로 금자광록대부에 오르고 회산군檜山君에 봉함받았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야사에서 조차 감철은 등장하지 않는다. 애초에 조선시대에 회산 감씨 문중에서 조상인 감철甘喆이 회산군檜山君에 봉해졌다고 주장하거나 그런 내용으로 족보를 만들었다면 역모죄로 일족이 멸족되었을 것이다. 이때문에 감철甘喆이 회산군檜山君에 봉함받은 뒤로 본관을 회산으로 한다는 주장조차 허구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데 현존하는 감씨들이 과거 회산군檜山으로 불렸던 지금의 창원시에 거주했기에 자신들의 터전인 창원시의 옛 지명인 회산檜山에 조상 감철甘喆을 내세워 조선시대에 회산군檜山君을 봉함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 회산군檜山君인 성종의 아들 이염李恬이 존재하기에 명백한 족보 위조로 봐도 무방하다. 이러한 이유로 전주 이씨들이 운영하는 홈페이지 등에서도 최근의 감씨 문중에서 이염李恬이 봉함받은 회산군檜山君을 자신들의 조상인 감철甘喆이 받았다고 족보로 기록하고 주장하고 있다며 한차례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다. 전주 이씨 문중에서 좋게 넘어갔는지 소송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감씨 문중에서 회산군檜山君에 봉해졌다고 주장하는 15세손 감철甘喆이 아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성종의 다섯째 아들인 이염李恬이 회산군檜山君 이라는 기록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4.회산군 감철의 묘소는 충청도 공모산에 있었고 어제御題한 신도비가 무덕곡에 있었다고 하나 없어져 후손들이 세거지인 창원시 내리동에 제단과 신도비를 설치하고 매년 음력 4월 15일 향사 한다고 하는데 정작 본인들의 족보에만 기록되고 주장하는 조상 감철甘喆이 금자광록대부에 오르고 회산군에 봉해졌다고 하면서 임금에게서 직접 하사받은 어제가 있는 신도비가 없어졌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현재 대한민국에서 회산 감씨가 과연 실제 회산 감씨인지 증명할 수 없다. 실제로 갑오개혁 후 많은 천민, 상민, 중인 계층드이 앞다투어 양반 성씨 족보를 꾸몄다고 하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미 조선 말기에 회산 감씨의 인구는 중국계 희귀 성씨의 특성상 극히 적었고 이미 조선 중기 이후 감씨는 몰락한 양반이었기에 후기때는 실제 감씨의 명맥은 끊겼다는 주장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갑오개역 이후 족보를 위작하는 이들 태반이 몰락한 양반 내지는 아예 대가 끊어진 성씨를 쓰는것이 허다했기에 감씨가 특별히 유별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대한민국에서 족보를 따지는 가문은 객관적으로 증명된 수백년이 넘은 족보를 가졌으며 이를 증명할 조선왕조실록이나 다른 사서에 관련 기록이 없는 경우 위조로 봐야한다는 사학계의 의견이 있다. 그런데도 감씨가 유독 족보 위조에 대한 비판을 받는 것은 이미 고려시대에 폐지된 금자광록대부를 조상인 감철甘喆이 받고 성종의 아들 이염李恬이 봉해진 회산군檜山君까지도 봉해졌다는 그 시대에서는 역모를 저지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지위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실제 충청도에는 공모산은 존재하지 않으며 한국의 산 중에서도 공모산은 존재하지 않으며 무덕곡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지명이다. 즉 감철의 묘소가 있다고 주장하는 지명들이 존재하지 않는 지명들로 조선왕조실록 등 사서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오로지 회산 감씨 문중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감씨들이 전하는 최근에 이들이 만든 족보들이다. 문제는 족보의 완성도가 너무나도 떨어져서 역사왜곡을 하는 내용이라 너도나도 족보를 꾸며서 가문을 양반 성씨로 포장하는 현대에서도 심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족보의 위조로 의심받는 것이다.

5.감씨는 여러 본이 있으나 모두가 동원분파로 회산 감씨의 세거지명에 불과하다는 것이 통념이다. 회산군檜山君 감철甘喆의 묘소는 충청도 공모산에 있었고 어제御題한 신도비가 무덕곡에 있었다고 하나 없어져 후손들이 세거지인 창원시 내리동에 제단과 신도비를 설치하고 매년 음력 4월15일 향사 한다. 없어진 이유도 직계 후손들이 명맥이 끊기고 분파들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던 중 다시 제단과 신도비를 설치하고 향사하는 이유도 한국인 특유의 자신의 집안이 양반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족보에 대한 집착 때문 및 정통성 문제로 봐야한다는 비판이 따른다. 실제로 회산 감씨 본관의 직계 명맥은 끊어진지 수백년이기 때문에 이들의 방계인 세거지명의 분파들이 족보를 만든다고 하여도 제대로 된 족보로 인정받지 못하는데다 내용도 조상을 드높이기 위해서라고는 하나 역사왜곡을 하는 내용이다. 더군다나 직계 명맥이 끊겼는데다 본관도 사라져서 종친회도 없어 현재 감씨에서 족보를 내셍는 이들도 소수로 이들도 감씨의 방계로 분파의 하나에 불과하기에 이들이 내세우는 족보가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4. 본관

감甘씨의 본관인 창원昌原, 회산檜山, 합포合浦 등은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일원이다. 신라 때에는 삽량주歃良州 굴자군屈自郡이었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굴자군을 의안군義安郡으로 이름을 바꾸고, 합포현合浦縣: 馬山 웅신현熊神縣: 熊川 칠제현漆隄縣: 漆原을 관할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금주金州: 金海로 병합되었다가 뒤에 감무가 파견되면서 독립하였다. 1282년에 의안군이 의창현義昌縣으로, 합포현이 회원현會原縣으로 개칭되었다. 1408년태종 8에 회원현을 병합하여 창원부昌原府로 승격하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이 설치되었으며, 1413년에는 창원도호부가 되었다. 1601년선조 34에 창원대도호부로 승격되었고, 1603년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이 진주로 옮겨갔으며 현종 무렵에는 현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창원군이 되었다가, 1896년 경상남도 창원군이 되었다.

                                     

4.1. 본관 분파된 성씨 본관

회산 감씨 에서 직계 분적된 성씨 관향에는 창원 감씨, 합포 감씨, 거창 감씨, 부령 감씨, 충주 감씨, 창녕 감씨 등이 있다.

                                     

5. 인물

  • 감상중甘尙中: 조선 전기의 문신. 성종成宗 5년1474년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로 문과에 급제하여, 군위현감, 시강원전적侍講院典籍 등을 역임하였다.
  • 감경인甘景仁, 1569년 ∼ 1648년: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회산檜山. 자는 여일汝一, 호는 관술정觀術亭. 아버지는 감예종甘禮從이며, 어머니는 반남 박씨潘南朴氏로 박종朴宗의 딸이다. 창원에서 태어났다. 1588년선조 21 무과에 급제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경륜景倫과 함께 이순신의 진영에 달려가 공을 세워 여도만호呂島萬戶가 되었다. 이어 내금위內禁衛 정략장군定略將軍이 되고, 원종공신의 적에 올랐다. 1606년 전계신全繼信 등과 함께 대마도에 파견되어 1년간 머물면서 도주島主 무네宗義智와 교섭하여 그들의 국서를 고치게 하고, 두명의 왕릉범王陵犯과 귤지정橘智正을 잡아오는 한편, 잡혀간 포로 150여 명을 데리고 오는 등 전후 수습에 힘썼다. 죽은 뒤 충훈부로부터 삼렬三烈이라는 사호祠號를 받고, 삼렬사에 봉안되었다. 저서로는『삼렬당문집三烈堂文集』이 있다.
  • 감기현甘麒鉉, 1880년 ∼ 1964년: 본관은 회산檜山. 자는 영팔英八, 호는 동미東湄. 어렸을 때 이름은 태현泰鉉이다. 증조부는 감수운甘守雲이고, 조부는 농와農窩 감회정甘檜廷이다. 부친은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 겸 의관僉知中樞府事兼議官을 지낸 우우재友于齋 감재원甘在元이고, 모친은 순흥順興 안중금安中嶔의 딸이다. 1880년고종 17 경상남도 창원군昌原郡 내동리內洞里에서 태어났다. 1899년광무 3 20세에 참정參政 민영환閔泳煥을 만나, 궁내부주사宮內府主事로 추천되었다. 1902년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으로 승진되었으며, 1904년 혜민원참서惠民院參書가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민영환이 죽자 그를 제사지내기도 하였다. 1907년 초계현감草溪縣監이 되었으며, 이후 김해부사金海府使가 되었다. 1907년 고종이 퇴위하자, 이에 분개하며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1825∼1912,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 등의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1942년 호서의 삼산三山으로 이거하여, 구조하具祖夏, 김기성金璂成 등 명사와 교류하였다. 1950년 전쟁을 피해 김해 청천으로 내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1964년에 죽었다.
  • 감한솔: 축구선수
  • 감녕: 중국 후한 말과 삼국시대 오나라의 해적 출신의 무장. 자는 흥패興覇. 파군 임강현 사람.
  • 감사용: 야구 선수, 감독
  • 감강찬: 피겨스케이팅페어 선수
  • 감우성: 배우


                                     

6. 과거 급제자

문과
  • 감상중甘尙中: 성종成宗 5년1474년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3위. 본관은 합포合浦
생원시
  • 감덕후甘德厚, 1519년생: 명종明宗 10년1555년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3등. 자는 후지厚之, 본관은 창원昌原.
진사시
  • 감경무甘景茂, 1556년생: 선조宣祖 22년1589년 기축己丑 증광시增廣試 3등. 자는 희수希秀, 본관은 창원昌原. 아버지는 안일호장安逸戶長 감흔甘昕.
                                     

7. 인구

감甘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 조사에서 5.998명으로 조사되었는데, 창원 감씨 2.685명, 회산 감씨 2.113명, 합포 감씨 94명으로 현재의 창원에 해당하는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인구는 4.892명이었다. 한편, 창원 이외의 지역인 거창 감씨居昌甘氏 522명, 창녕 감씨昌寧 甘氏 372명, 충주 감씨忠州 甘氏 112명, 부녕 감씨扶寧甘氏 65명 등이나 창원 감씨의 분파 세거지명인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