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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 라씨 는 전라남도 나주시를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라총례 는 고려 정종 때 삼한벽상일등공신의 호를 받고 삼중대광보국숭록대부로서 금성부원군에 봉 ..




                                     

ⓘ 금성 라씨

금성 라씨 는 전라남도 나주시를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라총례 는 고려 정종 때 삼한벽상일등공신의 호를 받고 삼중대광보국숭록대부로서 금성부원군에 봉해졌다.

                                     

1. 기원

고대 중국 축융의 후예로 알려진 금성 라씨는 본래 운성이었으나, 기원전 759년주나라 평왕 12에 라국羅國에 봉해진 후손들이 고을 이름을 따서 성姓으로 삼은 것이 라씨羅氏의 시초가 된다고 한다.

금성라씨대동보錦城羅氏大同譜)에 따르면, 축융의 후손 주공珠公이 한고조 때 나라에 공功을 세우고 예장군豫章君에 봉해져서 예장 나씨 豫章羅氏가 되었다가, 그의 후손 지강至强이 당나라 태종太宗 때 상서좌복야로 고구려 정벌을 반대하다가 미움을 받자 동래東來하여 백제百濟의 발라현發羅縣: 현재의 나주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2. 역사

금성 라씨의 시조 라총례 羅聰禮는 고려 정종 때 삼한벽상일등공신三韓壁上一等功臣의 호를 받고 삼중대광보국숭록대부三重大匡輔國崇祿大夫로서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금성錦城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시조 라총례의 아들 라은고羅恩誥가 자의대부資義大夫:고려 때 종2품 의빈품계로 공빈승을 지내고 금산군에 봉해진것을 시작으로 11세손에 이르기까지 3명의 후손이 대광大匡:정1품 품계의 벼슬에 오르고 4명의 부원군府院君과 5명이 봉군되어 금성라씨는 성족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조선 영조 때에 무신흉변의 화를 면하려고 나주의 옛이름인 금성으로 본관을 바꾸었다. 그러나 라총례의 후손이면서 아직도 나주를 본관으로 하는 계통도 있고 안정, 군위, 수성 등으로 본관을 하는 계통도 있다.

903년고려 태조왕건이 서남해 영상강상륙작전에 도움을받은 *종례*였는데 훗날 오다련과종례는 공을 인정받아 성씨를 하사받는다. 나주나씨. 나주오씨가 시조가 된다.

                                     

3. 표기

羅의 원래 발음은" 라”이지만 대한민국에서는 두음법칙에 따라" 나”씨로 표기하기도 했다. 2007년 8월 1일부터 한자로 된 성을 한글로 기재할 때" 柳류 羅라 李리”처럼 소리 나는 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가족관계등록 예규가 개정되었다. 현재 금성 나씨 와 금성 라씨 가 혼용되어 사용된다. 동성동본이족同姓同本異族인 나주 나씨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나주 나씨는 나씨로, 금성 라씨는 라씨로 표기하여 성씨를 구분하기도 한다.

대법원은 한자로 된 이들 성을 호적에 한글로 기재할 때 맞춤법두음법칙에 따라 유 나 이 등으로 표기하도록 하고 있는 예규를 고쳐 류 라 리 등으로 쓸 수 있게 예외를 인정하는 개정 예규를 2007년 8월부터 시행했다. 대법원은 성씨는 사람의 혈통을 표시하는 고유명사로, 일상생활에서 소리 나는 대로 사용한 사람까지 두음법칙을 강제해 기존에 쓰던 표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헌법상 기본권인 인격권, 자기결정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예규를 개정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4. 본관

금성錦城은 전라남도 나주시의 옛 이름으로 백제 때 발라군發羅郡으로 불렸고, 뒤에 죽군성竹軍城으로 바뀌었다. 백제 멸망 후 당나라가 이곳에 대방주帶方州를 설치하였으며, 686년신라 신문왕 6에는 통의군通義郡으로, 757년경덕왕 16 이후로는 금산군錦山郡 또는 금성군錦城郡으로 부르며 무주武州:光州의 관할로 두었고, 회진현會津縣‧여황현艅艎縣‧철야현鐵冶縣 등이 부속으로 영입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나주로 지명이 바뀌었고, 983년성종 2에 나주목이 설치되었다. 995년성종 14에는 나주진해군절도사羅州鎭海軍節度使가 되었다. 1018년현종 9 다시 나주목으로 고쳐 5개의 속군무안‧담양‧곡성‧낙안‧남평과 11개의 속현철야‧반남‧안노‧복룡‧원율‧여황‧창평‧장산‧회진‧진원‧화순을 거느렸다. 1310년충선왕 2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목으로 승격하였다. 고려‧조선시대를 통하여 주로 목牧, 부府로서 전남지역 행정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나주부로서 나주군 등을 관할하였고, 1981년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통합하여 금성시로 승격하여 나주군에서 분리되었고, 금성시는 1985년 나주시로 개칭되었다. 1995년 나주시와 나주군이 통합되어 나주시로 개편되었다.

                                     

5. 인물

  • 라득황 羅得璜: 삼한공신 대광大匡 라총례羅聰禮의 9대손. 최우崔瑀가 선지사용별감宣旨使用別監으로 삼아 지방에 파견하였고, 최항崔沆에게 아첨하여 장흥부사長興副使가 되었다가 전라안찰사가 되었다. 1260년원종 1에 장물죄로 파면당한 송소宋紹를 대신하여 제주부사濟州副使가 되었는데, 현지에 이르자 사람들이" 제주는 옛적에는 작은 도적을 겪었는데 지금은 큰 도적을 만났다.”고 하였다. 그 다음달 경자庚子에 제주부사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로서 방호사防護使를 겸하였는데, 이는 제주가 바다 가운데 큰 진鎭으로 송상宋商과 왜倭의 내왕이 잦아지므로 유사시에 대비하여 취해진 것이다. 1263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으며, 관직이 형부상서에 이르렀다.
  • 라유 羅裕,? ~ 1292년: 형부상서 라득황羅得璜의 아들. 음보蔭補로 경선점녹사慶仙店錄事가 되었고, 1269년원종 10 4월에 세자 심諶을 시종하여 원나라에 입조하였다. 그해 7월 세자가 원나라로부터 돌아와 파사부波娑府에 이르렀을 때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하고 세자의 입국을 기다리자 세자가 국경에 들어가는 것을 만류하였다. 이러한 개인적인 감정으로 임연이 라유羅裕의 장인인 조문주趙文柱를 죽이고 라유를 협박해 이혼을 강요했으나 의리를 들어 거절하였다. 1271년 원수元帥 김방경金方慶을 따라 진도珍島에서 삼별초三別抄를 토벌하는 공을 세웠다. 1272년에도 0의 삼별초를 치는데 군사 1.550명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또한 1273년 김방경을 따라 탐라耽羅: 현재 제주도의 삼별초 토벌에 선봉장으로 참전해 대장군大將軍에 올랐다. 이때의 공로로 남녀 노비 2명이 하사되고 원나라로부터 중통보초中統寶鈔를 받았다. 1274년 정월 일본정벌에 필요한 300척의 전함을 건조할 때, 담당 부부사部夫使가 되어 공장工匠과 인부 3.500여 명을 징집하는데 힘썼으며 그 경과를 보고하는 사신이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그해 10월 제1차 일본정벌 때 도독사都督使김방경과 함께 원나라의 도원수홀돈忽敦의 휘하에서 지병마사知兵馬使로 종군하였다. 돌아와서는 응양군대호군鷹揚軍大護軍이 되었으며, 그 군공軍功으로 원나라로부터 금패金牌와 무덕장군관고려군천호武德將軍管高麗軍千戶를 받았다. 그 뒤 제2차 일본정벌을 위해 합포合浦에 3번이나 출진하였다. 이때 예법에 밝다 하여 개경으로 소환, 팔관회八關會의 의식을 맡기도 하였다. 1282년충렬왕 8 5월에 2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1286년 8월에 지신사知申事, 이듬해 6월에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12월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다. 1287년 6월 왕에게 내안乃顔: 원나라의 반란세력을 직접 정벌하도록 청해 호두패虎頭牌를 받고 중익부만호中翼副萬戶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5월 만호동지밀직사사萬戶同知密直司事로 왕의 선두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에 참여하였다. 일이 끝난 후 1등공신에 책봉되었고 녹권錄券, 전田 100결, 노비 20 구口, 명위장군明威將軍의 호를 받았으며 원나라로부터 쌍주금패雙珠金牌를 받았다. 1289년 3월 충청도도순문사忠淸道都巡問使가 되어 군량을 독려하였으며, 같은 해 12월에 동계방수군東界防戍軍을 사열하였다. 1290년 5월에 합단哈丹이 국경을 침입할 때 통천지계通川地界에 진을 치고 그를 막았으며, 평양과 연기燕岐에서 합단을 크게 무너뜨렸다. 이듬해 6월 교주도交州道: 현재의 강원도에 파견되어 합단의 잔병을 토벌하였다. 1291년 11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원나라에 정조사正朝使로 다녀왔다. 이때 원나라로부터 삼주호부三珠虎符 옥대玉帶 은정銀錠 궁시弓矢 검劍 안마鞍馬 등을 받고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의 호를 받아 이듬해 돌아왔다. 예의에 밝고 옥사獄事의 판결에도 능하였다. 또한 용맹이 있어 전쟁에 임해서도 두려워하지 않아 변방에서 자주 공을 세웠다.
  • 라익희 羅益禧,? ∼ 1344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라유裕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혔으며, 17세에 원나라의 명으로 금부金符를 띠고 상천호上千戶가 된 뒤 관군상만호管軍上萬戶에 임명되었다. 충렬왕 말기에 신호위호군神虎衛護軍이 되었으나 충선왕이 신법을 제정할 때 이에 반대하다가 면직된 뒤 10년이 지나서 검교상호군檢校上護軍이 되고, 상의평리商議評理에 올라 금성군錦城君에 봉하여졌다.
  • 라문규 羅文奎: 초명은 라극종羅克綜. 라익희羅益禧의 손자이자 판밀직사부사判密直司副使 라영걸羅英傑의 아들. 모친은 원주 원씨原州元氏로 원충元忠의 딸이며, 부인 고성이씨固城李氏는 판서判書 이음李蔭의 딸이다. 1340년충혜왕 1 문과에 급제하였다. 1343년충혜왕 4에 명경박사明經博士를 거쳐 1346년충목왕 2 개성참군開城參軍으로, 1350년충정왕 2 낭장郞將으로, 이듬해에는 겸통례문지후兼通禮門祗侯로 임명되었다. 1352년공민왕 1에는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를 역임하였다가 1354년공민왕 3 진도현령珍島縣令에 제수되었다. 그가 죽자 공민왕은 관리를 보내 치제致祭하도록 하였고 나주羅州 거평면居平面 탄방炭坊 천마봉天馬峰 아래에 장사지냈다. 1390년공양왕 2 나주시 문평면文平面 오룡리五龍里에 건립한 봉강사鳳岡祠는 1812년순조 12 경에 죽헌竹軒 나계종羅繼從과 나문규를 춘추로 배향하기 위해 금성나씨錦城羅氏 문중에서 건립한 사당이다문화재자료 제94호.
  • 라세찬 羅世纘, 1498년 ∼ 1551년: 할아버지는 현감 라은제羅殷制이고, 아버지는 성균생원成均生員 라빈羅彬, 어머니는 찰방 윤노겸尹勞謙의 딸이다. 1525년중종 20 사마시에 합격하고 1528년 별시문과에 급제, 나주 황주의 훈도訓導, 성균관학유를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1536년 중시重試에서 장원해 봉교奉敎로 승진됐으나, 중시의 책문策文에서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전횡과 비리를 통박한 것이 문제가 되어 김안로 일파의 탄핵을 받고 고성에 유배되었다. 1538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다시 봉교로 기용되었고, 이 해 실시한 탁영시擢英試에서 장원을 차지해 문명을 떨침과 아울러 이후 수년 간 병조정랑 병조좌랑, 홍문관의 수찬 교리 응교 전한, 사헌부의 지평 장령 집의, 사간원의 헌납, 시강원의 문학 필선 보덕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1544년 이조참의로 특승特陞된 뒤 승정원동부승지 성균관대사성 판결사를 역임했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는 윤원형尹元衡이 유관柳灌 등을 탄압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체직당했다. 그 뒤 곧 대사헌이 되었지만, 권신 이기李芑와의 알력으로 일시 면직됐다. 뒤에 한성우윤으로 문소전文昭殿에 인종을 부묘祔廟하려다가 전주부윤으로 좌천되어 재직 중 병으로 죽었다. 두 차례의 장원급제로 문명을 떨쳤으며, 권신을 서슴지 않고 탄핵하는 기개가 있었다. 나주의 송재사松齋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재선생유고』 4권이 있다. 시호는 희민僖敏이다.
  • 라대용 羅大用, 1556년 ~ 1612년: 이순신 막하에서 거북선 건조를 위시한 모든 전구戰具의 준비 계획과 추진에 참여해 병선 건조에 온갖 정력을 쏟는 한편 15여 회의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6. 과거 급제자

금성 라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4명, 사마시 12명을 배출하였다.

문과

라경성羅經成 라세찬羅世纘 라홍순羅弘淳 라현돈羅泫敦

생원시

라기순羅箕淳 라득주羅得周 라빈羅彬 라석정羅錫正 라세찬羅世纘 라시혁羅時赫 라언羅偃 라원석羅元錫

진사시

라원집羅元緝 라정순羅晸淳 라찬경羅纘褧 라효창羅孝昌